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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의 특징,그리고 한복의 역사

by 정령연구원 2023. 5. 6.

 

 

 

1. 한복의 역사



한복(韓服)은 고대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대한민국의 고유한 의복이다. 대다수의 평민은 계량복 혹은 반바지 등을 입었으며 한복의 기본 구성인 
치마와 저고리, 바지 등은 변치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활동성을 중시하며 딱 붙는 옷이 아니다. 또한 천 
자체를 보면 직선형이지만 몸에 입을 경우 곡선이 살아나게 도와주는 미적 특징도 나타나는데 이는 주머니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복은 
호복이 아닌 기모노나 한푸 등 이웃나라들의 전통 옷차림과는 달리, 저고리와 치마, 즉 위 아래옷이 분리되어있어, 형태상으로 구분된다.
현대의 한복은 보통, 조선시대에 입었던 한복과 유사성이 크며 명절이나 격식을 갖추는 자리에서 입는 경우가 많다. 개량한복은 생활의 편리함을 
강조하고 있어 20세기 동안 그 외형이 여러 변화를 겪었다. 한복도 의복이므로 기성복처럼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시대의 흐름과 대중의 요구에 
따라 색과 소재, 특징 등을 새롭게 접목하며 이러한 시도는 여러 한복디자이너에 의해 현재에도 시도되고 있다.

한복의 시초는 삼국시대 한반도사람들의 복식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한복의 골격인 저고리, 바지, 치마라는 
기본구조는 그대로 이어지되 길이나 폭, 형태 등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였다. 폭에 관해서는 넓은 바지, 좁은 바지, 발목에 주름 잡혀 
좁은 발목 형태의 바지, 넓게 펼쳐진 밑단의 바지 등 폭과 길이가 다채로웠으며 허리 정도의 길이에 오는 저고리는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남녀 구분 없이
입었다.

 

 

2.백제의 한복

 


백제의 복식은 다른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 아름다움이 두드러졌으며 고구려보다는 여성적이다. 고이왕 27년(260년)에 정해진 관복의 
제도에서는 관복의 색감에 대한 정의가 내려질 정도로 의복이 발달하여있었다. 복식은 고구려와 흡사했으며 공식적이거나 그 중요성이 높을 경우 
여인들은 머리 장식을 했다. 남자의 경우 고구려와 비슷하게 포를 넓게 하여 항시 입었던 것은 동일했다. 그 때문에 관모에도 신하들의 직급에 따라 
장식 자체가 구분되었으며 임금은 금제, 좌평~나솔까지는 은제를 부착하도록 했다.

 

 

3.고구려의 한복

 


고구려 복식은 양성 모두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왔으며 아래는 바지를 입어 귀부인일수록 바지의 폭이 넓어지는 특징이 있었다. 다만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고 여자는 저고리에 바지나 치마를, 혹은 저고리와 치마를 겸해서 입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복식과 아주 다르지는 않으나, 
고구려의 경우에는 좌임, 우임, 합임(양쪽 어느 곳으로 모으지 않고 가운데로 모아 입은 형태) 등 세 종류가 공존하여 나타났고 상투나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머리 형태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명주와 무명, 삼베를 이용하여 미적 측면도 추구한 점은 유목 민족과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인은 항상 전투복과 같은 옷을 입고 다녀 비상사태에 대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옷의 활동성을 중시했기 때문으로 
복식이 뒷받침되었기에 전쟁에서도 능할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양잠이 발달했으며 옷감의 색 또한 다양하게 흰색, 검은색, 노란색, 보라색 등이 
쓰였다고 한다.

 

 

4.신라의 한복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늦게 발전한 만큼 훗날 두 나라와 당나라의 문물을 급속도로 받아들이면서 복식에 대한 개념도 성장했다. 
신라 때 전해진 당나라의 복식을 통해 남자 귀족들은 먼저 당나라의 복식을 입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가 당의 복식을 들여온 것은 
진덕여왕 2년(648)을 전후한 시기로서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한 증거가 된다.
신라도 이중적인 복식 제도를 취한 점이 비슷하여 고위층, 귀족들은 당나라의 복식문화를 수용하여 당나라의 옷 형태가 융화되었고,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았던 신라는 독자적인 복식을 겸용하여 발달해 나갔다.

 

 

 

5. 삼국시대의 한복과 그이후

 


삼국시대에 귀족 여성들은 아주 긴 형태의 치마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저고리를 입어 허리에 혁대를 착용했으며 남성의 경우 펑퍼짐한 
형태의 바지를 입고 좁고 남방과 비슷한 형태의 좁은 저고리가 허리 부근까지 오도록 입어 혁대를 착용했다. 이때 저고리는 단을 접어 입는 것이 
특징이었다. 삼국시대는 문헌과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고증이나 복원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에 따라 가야의 경우에도 
그 복식을 고증하는 일이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고령군은 대가야인의 복식이 목 부분이 둥근 곡선 깃 저고리를 입는 점에서 신라와 다르다는 
사실과 함께 가야제 철제도구에서 나타나는 무늬들을 세부 문양으로 채택했다고 밝혔다.


백제와 고구려 일부를 병합한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유민에 대한 포용 정책과 함께 당나라와의 교류가 융성하면서 복식 또한 매우 발달했다. 
특별히 골품제에 바탕을 둔 신라 사회와 마찬가지로 신분에 따라 문양이나 착용 여부가 정해졌다. 귀족 부인들에게 당나라식 복식이 허용된 것은 
신라가 통일을 이루기 조금 전인 문무왕 4년(664년)부터이며 삼국시대와 달리 어깨끈이 있는 치마를 저고리 위에 입은 형상이 경주시 용강동에서 
발견된 바 있다. 한편,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초기에는 포 형태의 전통 관복을 입는 등 고구려의 복식 제도를 계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3대 문왕 
이후에는 당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귀족층에서는 당나라의 관복제도를 따르는 모습을 보였고, 일반 백성들은 고구려의 복식과 주변 
소수민족(말갈, 거란 등)들의 복식도 어느정도 혼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왕조는 광종 때에 이르러 대대적인 왕권 강화가 이뤄진다. 광종 즉위 당시 고려는 출신에 따라 의복도 달라 색이나 특징조차 구분된 것이 없는 
상태였다. 이에 따라 광종은 과거제 시행 2년 뒤, 보라색, 붉은색, 연두색, 자주색 네 종의 소매 색깔을 규정했다. 다른 나라의 의복이 한복에 미친 
영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거나 피상적이었지만 몽골의 경우만이 이례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한복에 시각적인 변화를 실증적으로 일으켰다. 
고려가 13세기 원나라 간섭기 때 부마국이 되자 몽골 공주가 고려 왕실로 오게 되었고 몽골 의복이 고려 궁중 복식에도 일부 반영되어 넓은 고름이 
쓰이면서 허리춤에 혁대를 묶는 것을 대신하였다. 원나라의 내정 간섭 영향은 왕후와 후궁, 귀족들의 의복에도 변화를 야기했다. 그러나 원나라의 
복식 자체가 한복의 원형에 영향을 끼쳐 발전 요소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증거로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로 지나면서 
길이가 갈수록 짧아진 저고리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초, 한복은 소매가 헐렁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실례를 보여주는 유물은 박익(1332–1398)의 묘에서 발굴된 벽화이다. 조선은 개국 후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므로 복식에서도 계층적 신분 질서를 여러모로 규정하여 치마의 경우 조선 전기에 출토된 스란치마는 명나라 시대의 치마와 거의 
유사하고 화문 또한 유사성이 많았다. 그러면서 저고리의 길이는 길어지고 치마는 허리에서 입는 형태여서 폭이 넓어지다가 16세기 들어 저고리는 
허리 윗부분으로 그 길이가 짧아졌으며 좀 더 가슴 부분으로 올라갔다. 조선 중기에 나타나는 복식의 특징은 남성과 여성 한복 모두 대체로 
등길이가 길어 허리 밑까지 내려올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짧아졌다는 점이다. 여성의 저고리는 이러한 추세를 바탕으로 조선 말엽에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길이가 짧아지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이전에는 좀 더 수치를 크게 입었다면 후기에는 품도 몸에 맞도록 입게 되었다. 또한 
저고리가 치맛말기를 가려 주지 못함에 따라 치마와 저고리 사이의 겨드랑이 밑을 가려 주기 위하여, 한 자정도 되는 넓은 띠를 이 부분에 매었다. 
이러한 변화로 조선 말엽, 저고리의 길이는 축소화가 진행되는 반면 치마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길어지고 폭도 넓어진다. 그러다 18~19세기에는 
종 모양처럼 저고리의 실루엣이 봉긋해지는 형상으로 바뀌게 된다.

1960년대까지도 한복을 입은 시민들의 활보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양복과 옷감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한복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본 강점기에는 소위 신여성들이 짧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어 개량한복의 시초가 나타났고 한동안 이러한 형태의 복장이 
신여성의 복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오늘날의 한복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한복의 직계이며 조선시대의 것과 흡사하지만 19세기의 한복, 다시 말해 조선 후기의 형태와 가장 비슷하다. 
500년 조선 통치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 유행을 타기도 했으며 현재에 이르러 대부분의 한복을 지칭하는 형태로 정착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복을 명절이나 특수한 날에만 입게 되었으며 사람들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생활 한복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1984년, 한 한복 
디자이너가 개량된 한복을 작품으로 발표한 것을 시초로 비슷한 형태가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개량한복은 기존 한복과 달리 저고리의 고름이 
착용에 용이하도록 단추로 대체됐고 부피가 큰 치마를 서양식 의복과 접목하여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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