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 연평해전 이란
제1연평해전(延坪海戰)은 1999년 6월 15일에 서해 연평도서 일어난 대한민국 해군과 조선인민군(북한) 해군 간의 교전이다.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이 연평도 서쪽 NLL을 2km 침범하여 일어났고 조선인민군 해군의 경비정 1척 침몰, 5척 파손, 사상자 50(전사 20, 부상 30)여명이 발생하였다.
같은 해 7월 3일,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연평해전'이라 명명했었으나, 차후에 제2연평해전이 일어남에 따라 이 전투는 제1연평해전으로 구분되었다.
1998년 초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였고,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남한의 동해항을
출발한 관광선이 북한 장전항에 도착하여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에 관련된 협상이 진행 중이던 1998년 6월에는 동해
북방한계선 남쪽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북한의 잠수정이 어선의 그물에 걸려 발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대하여 '잠수정은 잠수정, 햇볕은
햇볕'이라 하며 햇볕정책과 잠수정 침투를 분리하여 대응하려 하였다. 인양된 잠수정 내부에서는 다수의 개인화기와 함께 사살된 9명의 승조원이
발견되었고, 잠수정에는 어뢰발사기가 2문 장착되어 있었다. 승조원의 시신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다.
1998년 7월에는 동해시 부근에서 북한 무장 간첩의 시신이 침투용 장비와 함께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를 통해 북한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였고, 북한은 이를 남한의 날조라고 주장하면서 남측에 잠수정 사고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금강산 관광이 진행 중이던 11월에는 간첩선이 강화도 해안에 접근을 시도하다가 귀환했다. 12월에는 여수 앞바다에 침투하던 반잠수정이 대한민국
군대에 격침되었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6월 초부터 북한 경비정들이 연평도 부근의 NLL 남쪽으로 연일 내려와 남북한 전력이 서로 대치하였다. 남북 양측은 남북한
장성급 회담을 열기로 합의하였고, 회담은 제1연평해전이 있던 6월 15일에도 진행되고 있었다.
◆1999년 6월 6일부터 북한군 경비정이 매일 북방한계선을 침범, 몇 시간씩 한국 영해에 머물면서 반응을 살피고 돌아갔다.
◆1999년 6월 15일, 북한군 경비정의 반복되는 북방한계선 침범 행위가 9일째 되는 날인 오전,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 4척이 어선 20척과 함께
북방한계선 남쪽 2km 해역까지 내려왔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은 참수리급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을 동원하여 해군 교전 수칙에 따라 경고
방송했다.
◆8시 45분, 북한군 경비정 7척,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접근하여 충돌 공격을 감행했다.
◆9시 7분, 대한민국 해군 1차 '밀어내기' 경고 실행
◆9시 20분, 2차 밀어내기' 경고 실행
◆9시 28분, 북한군 경비정 684호는 25mm 기관포로 공격을 가해 왔으며, 어뢰정 3척도 가담하였다. 684호는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급 고속정,
포항급 초계함의 반격으로 반파되어 퇴각하였다.
14분간 진행된 교전에서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 대위를 비롯한 장병 7명이 상처를 입어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이에 반해
북한군은 어뢰정 1척 침몰, 경비정 1척 반파, 3척이 파손되고 1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1999년 7월 4일 제1차 연평해전에 참가했던 해군 유공 장병 7명을 1계급씩 특진시켰다. 이에 따라 해군 고속정 편대장 최용규 소령과 하사 4명,
일병 2명이 각각 중령과 중사, 상병으로 진급하게 됐다. 군 장병들이 그동안 대간첩작전 공훈 등으로 훈장 받은 사례는 있으나 교전으로 특진한 것은
6·25와 월남전 이후 처음인 사례로 기록됐다.
◆1999년 7월 7일, 안지영 대위는 을지무공훈장을 수상했다.
◆1999년 11월 11일, 대한민국 해군은 연평도 당섬에 연평해전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높이 9.35m의 전승비에는 `연평해전'이 발생한 배경과 북한해군의
선제공격에 대응한 우리 군의 전력, 승전 내용, 그리고 해전의 교훈 등이 담겨 있다.
2. 전력 비교
제1연평해전시 교전에 참여한 남북한 함정들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남한
◆해군 고속정(PKM)
제원: 150톤급, 길이 37m, 최고속도 40노트(시속 72km)
무장: 40mm포 1문, 20mm포 2문 장착
◆초계함(PCC)
제원: 1200톤급, 최고속도 32노트, 95명 승선
무장: 76mm포 2문, 40mm기관포 2문 장착, 미스트랄 미사일, Harpoon 미사일, 어뢰와 기뢰 탑재
북한
◆청진급 경비정
제원: 80톤급, 길이 25m, 최고속도 30노트(시속 54km)
무장: 100mm포 1문, 14.5mm 기관총 4문 장착
◆신흥급 어뢰정
제원: 37톤급, 최고속도 시속 90km, 16명 탑승
무장: 14.5mm 기관총 2문, 어뢰 2발 장착, 포탄 교란용 장애포 장착
3. 제2 연평해전 이란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북한군의 선제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도중 침몰하였고, 정장(참수리급은 150톤급으로 "함"이 아닌"정" 지휘관도 "함장"이 아닌 "정장")을 포함한
승무원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하는 인명피해를 겪었다. 조선인민군(북한군) 해군소속 등산곶 684호도 대한민국 해군의 반격으로 전투 후 상당한
손해를 입고 예인됐다. 제2연평해전으로 조선인민군 해군 1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일어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 시 차단 기동에 대한 논란이 일었으며, 이후 차단기동은 교전수칙에서 삭제되었다.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은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날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이남 지역에서 북한의 무력
기습도발로 남북 간 충돌이 일어났다. 교전수칙에 따라 차단기동으로 대응하던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괴군 등산곶 684호의
지근거리 기습 함포 공격으로 시작되어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받는 치열한 격전이 된 전투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고, 전투 종료 후
복귀 도중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한 반동 괴뢰군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예인되어 퇴각하였다. 집중 포격을 당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1계급 추서)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 정장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이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소령은 총상으로 한쪽 종아리의 근육을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군 당국은 전군에 경계 강화령을 내리고 서산 상공에서 초계 비행하던 KF-16 전투기 1개
편대를 NLL 인근 해상으로 긴급 파견해 확전에 대비했다. 청와대 또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는 등 비상 태세에 들어갔으며, 김대중 대통령
은 NSC에서 "북한 경비정이 선제 기습사격을 가하는 등 무력도발 행위를 자행한 것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는 행위로
묵과할 수 없다"며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군 당국이 더욱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춰 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6월 29일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ㆍ4위전 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을 취소했으며,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30일 일본을 방문하는 일정도
다시 검토됐으나 일정 취소가 국민 불안감을 높이고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촉발할 수 있다고 판단해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김대중 대통령은 공동 개최국 대표로서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참석과 일본 총리와 갖는 정상회담을 위해 6월 30일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2007년 6월 28일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한 차기고속함 1번 함이 윤영하함으로 명명되어 진수되었으며, 2009년 6월 2일 실전에 배치되었다. 2009년 9월 23일
STX조선해양에서 2번 함이 한상국함으로, 3번 함이 조천형함으로 각각 진수되었다. 2009년 12월 11일 한상국함과 조천형함에 이어 STX조선해양에서
4번 함인 황도현함, 5번 함인 서후원함이 각각 진수되었다. 2010년 7월 28일 한진중공업에서 6번 함인 박동혁 함이 진수되었다.
교전 당일인 2002년 6월 29일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나열해 보았다.
◇ 06:30 어로 보호 지원을 위해 남한의 고속정 3편대 6척 출항.
◇ 09:54 북한군 경비정 등산곶 388호(155톤) NLL을 넘어 남하 시작. 대한민국 해군 253 고속정 편대 대응 기동 실시.
◇ 10:01 북한군 고속정 등산곶 684호(215톤) 추가 남하. 대한민국 해군 232 고속정 편대가 대응 기동.
◇ 10:25 북한군 등산곶 684호가 탑재된 85mm 함포로 450m 거리에서 차단 기동을 실시하던 참수리 357호에 기습 발사, 남한 232 편대 대응 사격.
이 과정에서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파괴되고 윤영하 정장이 전사.
◇ 10:26 후방에 있던 253·256 고속정 편대 전파사격 개시.
◇ 10:30 256 편대 공격 개시.
◇ 10:33 253 편대 공격 시작.
◇ 10:43 제천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개시.
◇ 10:47 진해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시작.
◇ 10:48 제천함, 북한 스틱스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 10:51 화염이 발생한 북한 경비정 다른 경비정에 예인되어 NLL 북쪽으로 퇴각.
◇ 10:56 전 전력 사격 중지.
◇ 11:25 제천함·진해함, 북한의 실크웜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 11:45 357호 사상자 확인·구조. 357호는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 포기.
◇ 11:59 참수리 357호 침몰.
4. 제2 연평해전 그 이후
대한민국 해군 소속 참수리 357호 교전 이후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을 포기, 침몰했으며 침몰 당시에는 탑승한 승무원 30명 중 4명이 전사, 1명이
실종되고 20명이 부상하였으나 이후 치료받던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이 국군수도병원에서 전사했으며 실종되었던 한상국 중사(당시 하사)가 침몰
41일째에 조타실에서 발견되었고, 53일만인 8월 21일, 침몰한 배가 인양되고 수습되어 결과적으로 총 6명 전사 19명 부상하였다. 대한민국 군 당국은
북한 경비정이 3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하였다. 인양된 참수리 357호는 85mm 대구경 5발, 37mm 중구경 19발, 14.5mm 소구경 234발 등
모두 258발을 맞았으며, 40mm 중구경과 20mm 소구경 680발을 발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6월 30일 교전 과정에서 전사 또는 실종된 해군 장병 5명에게 일 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을 추서했다.
2002년 6월 30일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에는 이한동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군 장병 등이 방문했다. 이 총리 등 국무위원 일행
21명은 이날 합동분향소를 방문, 헌화 및 묵념하고 고(故) 윤영하 소령에게 충무무공훈장, 고(故) 조천형 중사 등 사망 및 실종 병사 4명에게 화랑무공훈장
을 각각 추서했다. 이 총리는 이어 병실을 찾아 부상 장병 19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훌륭하게 싸웠소. 용감했소"라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2002년 7월 2일 일본에서 귀국한 김대중 대통령은 "만약 북한이 또다시 군사력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주려 한다면 그때는 북한도 더 큰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국군수도병원을 방문, 제2연평해전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위로했다. 교전 발생 후 한 달 뒤인 7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 5명의 가족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했다.
무려 5단계에 이르던 대응 기동 절차는 해군의 손실을 불러왔다. 참수리 357호도 차단 기동 중 기습당했다.
기존에는 경고방송→시위 기동→차단 기동→경고사격→격파 사격이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차단 기동'이었는데 기습공격을 받기 가장 쉬웠다.
이에 국방부는 2002년 7월 차단 기동 과정을 삭제했으며, 2004년 시위 기동과 경고 방송을 동시에 하도록 하여
경고 방송·시위 기동→경고사격→격파 사격의 3단계로 개정했으며. 이는 후에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 승리의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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